만물시장 / 2007


이영이 수집한 만물시장의 옛 간판들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2007년도 이영은 청계천 일대의 상점들, 황학동의 만물시장 등을 돌아다니면서 그곳의 가게들에 걸린 간판을 촬영했다. 당시 그가 흥미롭게 본 간판은 함석판에 페인트를 묻힌 붓으로 쓴 상호명이다. 공들인 궁체풍의 서체로 쓰여진 한글 문자는 오래 전의 것들로써 어딘지 복고적인 내음을 진하게 풍겨주었다. 순수한 문자만으로 이루어진, 서체가 주는 필력의 맛이 응축된 당시 간판은 아날로그 간판의 매력을 온전히 가시화하면서 현판처럼 걸려있다. <보전당>, <쓰리스타상사>, <개미슈퍼>, <무아레코드>, <삼부화랑>등이 그것이다. 전적으로 간판만을 안겨주는 사진 속에는 오로지 문자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는 도시의 간판, 간판에 쓰인 문자를 채집한 셈이다. 그것들은 이제 주변에서 보기 어려운 희귀한 간판들이다. 오늘날 누가 붓으로 그런 문자를 쓰고 있을까? 인간의 손길, 노동의 내음이나 익숙하게 숙련된 누군가의 필력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간판은 실종되었다. 마치 직접 그린 영화 간판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듯이 말이다. 동일하게 손으로 직접 간판을 썼던 간판장이들이 사라지고 그러한 간판도 사라졌다. 이제는 기계가 그런 일을 대신하고 있다. 아직은 청계천 일대의 오래된 가게들은 여전히 그 옛날의 간판을 달고 있다. 아마도 지방 어느 허름한 동네에 이런 간판은 남아있을 것이다. 하여간 그 간판들은 사라지기 직전의 것들이다. 이영은 그러한 죽음, 부재, 사라짐을 목도하고 이것들을 수습해 사진으로 남겼다. 간판에 대한 애도! 일찍이 1930년대에 김복진은 당시 경성시가지를 장식하고 있던 간판의 의미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자본주의의 위력을 간판에서 간파한 것이다. 간판은 상품경제에서 불가피한 선전도구이자 도시를 장악하는 강력한 이미지다. 오늘날 도시의 건물들은 온통 무수한 간판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건물의 외관을 빼곡히, 촘촘히 점유하고 있는 간판은 그 모든 것을 압도하면서 현란하고 무지막지한 문자를 관자들에게 거의 폭력적으로 안긴다. 그것은 사람들의 욕망의 도화선을 건드리고 그 무엇인가를 갈구하게 하는 동시에 경쟁적으로 자기 존재를 가시화한다. 이영은 그런 간판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 들어온 간판들은 다분히 복고적인 간판들이고 더 이상 생존할 수 없게 된, 효율성과 합리성, 기계화의 대세에 의해 밀려난 손작업으로 이루어진 누추한 간판들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간판들은 형언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묘한 향수와 회고적 감정도 일고 문득 안타까운 추억들을 거느린다. 어린 시절 동네에 위치한 간판가게의 주인들은 대부분 저렇게 함석판으로 만든 바탕위에 페인트를 찍어 능란하고 익숙한 솜씨로 한글 서체를 멋들어지게 쓰곤 했다. 마치 혁필화를 그리던 이처럼, 옛날 장돌뱅이 민화가들이나 이발소 그림을 그리던 이들처럼 말이다. 생각해보면 간판도 나름의 역사가 있다. 나무판에 쓴 한자 간판을 지나 함석판에 페인트로, 이후 세련되고 멋진 디지털 간판 등에 이르기까지 변천을 거듭해왔다. 이영이 보여주는 간판들은 지난 시간대의 한국 간판의 이력의 어느 한 순간을 ‘훅’ 하고 안긴다. 거기에 잊고 있었던 누군가의 공력과 손의 힘과 소박하지만 나름 진솔했던 상호명이 주는 추억의 여운이 짙다.작업노트
상점의 주인이 달라지면 간판을 바꾸기 마련이다. 오랜 시간 한 곳에서 장사를 한 것일까? 통념 외로 간판마저 중고일까? 황학동 중고재래시장의 이미지는 오래된 듯 보이는 간판이 한몫 한다. 검정, 빨강, 노랑을 사용한 순 한글 뿐인 간판은 키치한 감성을 일게 하고 손때 묻은 중고품에 대한 인상을 떠오르게 한다. 간판은 하나의 유형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중고품은 무엇보다 사용가치가 우선이다. 그럴 듯한 포장은 상대적으로 빛을 잃고, 견고하고 쓰임이 분명해야 가치를 얻는다. 가끔은 기능보다 기억이 귀해지면 골동품으로 환골탈태하기도 한다. 이곳의 간판은 중고품과 골동품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언제든 페인트로 쓰고 지울 수 있는 형태와 예스러운 서체와 이름은 그것이 덧칠하거나 실제로 오래된 것이든 아니든 중고재래시장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30-40년이 되었다는 주인의 말에서 자부심마저 드러난다. 자신이 운영하는 상점의 간판임에도 잊고 있던 듯 ‘오래되긴 오래됐지’와 같은 무심한 반응도 있다. 간판은 그들에게 쓰임이 좋은 상품이고 귀한 고물이다. 손에 닿는 것은 죄다 중고품이고 골동품인 곳에서 간판 역시 다르지 않았다.참고


- 2020, 《만물시장》, Label gallery, 서울, 개인전
- 2010 《ASYAFF2010 특별전, 태양은 가득히》, 성신여대 수정관, 서울, 단체전
- 2008 《Everyday is not the same》, BizArt, 상해, 단체전
- 2007 《기생문자》, 갤러리룩스, 서울, 단체전
- 2007 《황학동-만물시장》, 충무아트홀, 서울, 단체전
참여한 전시
- 2009 《인민로》
- 2009-10 《평화와 통일》
- 2018 《호안끼엠》
- 2021 《바이센지》
- 2021 《라벨을 보다 Lee Young X Label Gallery》
- 2022 《사랑곳》
- 2023 《비늘》
- 2024 《라벨을 보다 2024》
- 2025 《포장된 공간》